칸트의 비판철학(writing)
결국 ‘판단’(력)의 문제다1). 판단에는 반성적 판단과 규정적 판단이 있다. 『판단력비판』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반성적 판단이며,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그것은 규정적 판단의 한 양태다2).
1) 임팩트 있는 글쓰기와, 풀어쓰는 글쓰기; 선택의 문제.
2) 이러한 파악을 통해 의문이 하나 풀린다: 인식론을 인지과학이나 뇌과학으로 대체하는 문제, 칸트가 인식(사변적 관심뿐 아니라 외부 대상에 대해 갖는 이성의 모든 관심)에 대하여 설정한 능력들/기능들(이성, 지성, 상상력)을 뇌 등에서 찾을 수 있는가? 칸트의 제안이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이 아닌 긍정적인 답변이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 부정적인 답변, 예컨대 칸트의 제안은 실증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지만 그 나름의 의의가 있다 등등. 그런데 어떤 ‘나름’의 의의? 결국 역사적 의의밖에 남는 것이 없다.
인식능력들 각각에 주목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단순한(분해불가능한) 기능으로서, 일종의 기관으로서 이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기관이 위치하는 육체의 장소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가설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판단이라는 작용을 가능케 하는 힘(능력)들로서, 판단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정신적 사태들로서 이해한다면, 칸트의 제안에 말그대로의 현대성이 드러난다. 우리는 인식능력들에 어떤 고정된 장소를 지정해줄 필요가 없다. 대신, 판단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과정을 제안할 필요가 있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 지성, 상상력은 이러한 물리적 과정과 판단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물리적 과정은 철학의 대상이 아니다. 물리적 과정에 대한 진리는 (자연)과학에 의해 생산된다. 철학은 그 진리들을 그 원래의 맥락에서 이탈시켜 그 자신의 목표에 적합하게 변주해야 한다. 여기서의 이탈이 오독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이러한 철학의 작업은 정당하며 또한 요구된다. 정신이 실재하며, 또한 (지금의 맥락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다면.
-이러한 작업의 사례: 키스 W. 포크너, 『들뢰즈의 시간의 세 가지 종합』에서 2장, 3장.